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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은 김춘추(金春秋)를 도와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 되게 하고 함께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大業)에 나서 무열왕(武烈王) 7년(660)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 백제(百濟)를 공격(攻擊)할 때 신라군(新羅軍)
총대장(總大將)이 되어 계백장군(階伯將軍)이 거느린 백제군(百濟軍)을 황산벌(黃山伐)에서 무찔러 백제를 멸망(滅亡)시켰으며 문무왕(文武王)
8년(668) 고구려(高句麗)를 공략(攻略)할 때도 신라군 총사령관(總司令官)이 되어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고 이어서 삼국(三國)의
영토(領土)에 야심(野心)을 드러낸 당(唐)나라 군사(軍士)도 물리침으로써 통일(統一)의 위업(偉業)을 완수(完遂)하였다. 이렇게
혁혁(赫赫)한 무공(武功)을 세운 장군(將軍)은 문무왕으로부터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신라 최고(最高)의 관작(官爵)을 받았고 뒷날
흥덕왕(興德王)은 장군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 이 묘(墓)는 직경(直徑) 30m나 되는 큰 무덤으로 봉분(封墳)
아래에는 병풍(屛風)처럼 판석(板石)으로 호석(護石)을 설치(設置)하였고 호석(護石) 중간중간에는 평복(平服)차림에 무기(武器)를 든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배치(配置)하였다. 호석의 밖으로는 여러 개의 돌기둥을 세워 난간(欄干)을 돌렸다. 한편 호석의
12지신상과는 별도로 높이 약 30cm의 납석(蠟石)에 정교(精巧)하게 새겨 묘(墓)의 주변(周邊)에 땅을 파고 묻어 두었던 12지신상이
출토(出土)되기도 하였다. 묘의 앞에는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세웠던 비석(碑石)이 있으며 석상(石床)은 최근 묘를 수리할 때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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